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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아카데미

우영우, 골목식당, 그리고 작은교회

by 교회개혁실천연대 2023. 4. 14.
본 글은 교회개혁실천연대
창립 20주년 기념포럼 <작은 교회 욕망에 관한 보고서 - 구미정 교수> 내용 일부입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 드라마 기억하시나요? 예상치 못한 히트를 쳤던 드라마.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지식을 대중에게 알려준 드라마. 법정 드라마라 하기에는 장애인, 차별 등의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었고, 사회 문제를 다룬 드라마라 하기에는 코믹 요소가 다분했던. 아무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스토리로 대중에게 사랑받은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에는 악역인 듯 악역 같은 악역 아닌 권모수술라 불리는 변호사 권민우가 등장합니다.  그는 우영우와 같은 로펌의 동료 인턴입니다. 그러나 우영우를 시기하고 우영우가 봄날의 햇살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또 다른 동료 최수연도 시기 질투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권민우는 열심히 노력해서 '개천에서 용 난 인물로' 대형 로펌 인턴 변호사가 되었는데 '봄날의 햇살' 최수연은 이른바 금수저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변호사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 권민우는 우영우도 못마땅합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늘 배려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권민우, 왜 그럴까요?? 그는 'IMF 세대'의 아들입니다. 태어날 때는 국가부도로 가장의 실직과 자살이 줄을 이었고, 이후 저성장의 늪에서 무한 경쟁 세상을 경험한 세대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을 뼛속 깊이 새겨 넣어야 했습니다. 

권민우는 현재 한국 청년의 모습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권민우와 같은 수많은 청년들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단지 제도만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순진합니다.

일단 우영우 드라마는 여기까지

 

골목식당

 

각 시대마다 까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건들면 안되는 존재들이 있죠. 지금은 백종원 대표가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까도록 하겠습니다. 백종원 대표 개인에 관한 비판 혹은 비방이 아니니 오해 마시길.

지금은 종방한 골목식당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얼개는 이렇습니다. 파리만 날리는 골목식당이 등장합니다. 그곳에 백 대표가 출동하죠. 식당에 사람이 아닌 해충만 방문하는 원인을 진단합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쏠루션!!!을 제공합니다. 그런 과정 중 식당주인은 그동안 해오던 방식을 고집합니다. 백 대표에게 크게 야단을 맞죠. 여기에 방송의 특효 '악마의 편집'이 등장합니다. 백 대표와 식당주인의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 유지됩니다. 그리고 결국 식당주인 패배. 극적으로 파리가 방문하는 식당은 이제 줄 서는 맛집으로 변모합니다. 

 

작은 교회

 

골목식당의 '식당'을 '교회'로 치환해 보면, 골목식당 프로그램의 문제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우선 '작은 교회' 그 자체가 악이라는 발상이 숨은 전제로 깔려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교회 문을 열었으면 교인도 좀 많이 생기고 헌금도 좀 많이 들어오고 이래야 선한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죄'라는 것이죠. 

이 구도에서 '작은 교회' 목회자는 졸지에 '무능하고 게으른 종'으로 전락합니다. 노력하면 당연히 성공하는 것이 목회인데, 성공하지 못했으니 목사가 노력하지 않은 것이라고 매도합니다. 

그런데 교회 성장이 순전히 목회자 개인의 역량에 달린 문제인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미 알다시피 한국교회의 성장은 한국의 자본주의 급팽창과 맥을 함께합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강력한 군사문화를 바탕에 깔고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중앙집권적으로 산업 발전을 주도하던 개발독재 시기에 한국교회도 똑같은 기제를 차용하여 몸 불리기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소비 자본주의 시대와 민주화 시대가 도래하며 우리 사회의 가치도 변모합니다. 이 시기 한국교회에는 이른바 '강남형' 대형교회가 등장합니다. 변모된 가치에 발맞추자 교회가 성장했다는 뜻이죠

'강남'은 단순히 지역명이 아니라 우리의 집단무의식을 장악한 주요 욕망. 부에 대한 욕망입니다. 야베스의 기도, 목적이 이끄는 삶, 긍정의 힘 등의 책이 기독교 스테디셀러가 된 것은 한국 사회의 주요 욕망이 교회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시 에클레시아

 

헬라어로 교회라 불리는 에클레시아는 본래 있었던 용어입니다. 로마제국의 시대에 도시마다 있었던 민회(시민의 대표자 회의)를 일컫는 용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에클레시아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인종과 계급 성별 질서를 가로지르는 집합체이고 반체제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모임이 로마제국 시대에 만들어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모임이 만들어진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새로운 삶의 길'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이야말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본래 이런 속성을 가진 것들은 무엇이든지 사람을 매혹하는 성질이 있다. 어떤 반동도 그 길의 인력을 당할 재간이 없다.
그 길을 일컬어 복음서 저자들은 '하나님 나라'라 적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바실레이아(Kingdom)'는 '로마 황제의 바실레이아'의 반명제입니다. 진공상태에서 등장한 단어가 아니라 엄연히 로마 황제의 바실레이아에 몸 붙여 살고 있으나, '이제 여기'의 바실레이아에 만족하지 않고 그 너머의 '바실레이아'를 꿈꾸었습니다. 이러한 바실레이가 로마제국 곳곳에서 점조직으로 퍼져서 나비의 날갯짓처럼 조용히 움직이며 연대하며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환상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운동보다 시급한 것은 연대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휘둘려 기진할 때가 많습니다. 시시각각 엄습하는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 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애정 어린 돌봄이 안정적으로 제공되는 환경 속에서 유치한 자기중심적 생각을 벗어던지고 다른 이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고 연민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운동'보다 '연대'가 필요합니다. 운동은 동지가 필요하지만, 연대는 동무로 족합니다.(구미정 교수는 동지는 이념으로 뭉친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이념이 깨지면 협력도 깨지는 것이죠. 그러나 동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념이 달라도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그저 함께 가는 친구를 뜻합니다)

초대교회, 하나님의 바실레이아 그 자체였던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이제 여기'의 삶이 전부인 듯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높은 자리에 가려고 하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삶의 결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 삶의 결은 약한 자와 연대하고 낯선 자를 환대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불가해한 생활양식입니다.

 

교회는 어떤 욕망을 꿈꾸는가

 

오늘 우리도 우리의 욕망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예수님 사후 로마제국의 지배 속에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로 모인 사람들의 욕망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영우의 대사를 인용하며...

 

길 잃은 외뿔고래가 흰고래 무리에 속해 함께 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요. 저는 그 외뿔고래와 같습니다. 낯선 바다에서 낯선 흰고래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모두가 저와 다르니깐 적응하기 쉽지 않고 저를 싫어하는 고래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게 제 삶이니까요.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 중



'우영우복음'(^^)의 백미입니다. 지구인의 욕망을 획일화한 신자유주의 바실레이아 안에서 틈을 내고 길을 여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한국교회가  이 소리의 울림통이 되길 바랍니다. 두려움을 정치화하려는 숱한 시도들, 그 술수에 넘어가 타자에게 곁을 내주지 않으려는 무정한 권민우들이 가득한 이 시대에, 권민우로 대변되는 수많은 사람들조차 '봄날의 햇살'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끝-

 

우영우
출처: 우영우 포스

더 풍성한 내용은 아래에서

https://youtu.be/-abJAPaq-s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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